[210701-22] 연속기획포럼 "청년 돌봄, 더 잘 돌볼 권리를 찾아서"를 개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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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세연 작성일21-08-27 17:16 조회830회 댓글0건본문
지난 7월 1일부터 22일, 매주 목요일에 진행한 연속기획포럼 "청년 돌봄, 더 잘 돌볼 권리를 찾아서"를 진행했습니다.
기획단은 4회 연속포럼 발표와 토론을 통해 더 잘 돌보기 위해 돌봄을 하는/받는 청년에게 어떤 권리들이 필요한지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발표와 토론, 참가자분들이 나누어주신 이야기를 토대로 방이 아닌 집에 살 권리, 모든 공간에서 안전할 권리, 돌봄을 '선택'할 권리, 돌봄 관계를 상상할 권리, 돌봄을 받을 권리, 제도 설계의 주체가 될 권리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4회 연속포럼의 발표와 토론문뿐만 아니라 기획단의 후기까지 알차게 담은 자료집, 꼭 읽어봐주세요! 감사합니다.
기획단 후기
청년 돌봄, 더 잘 돌볼 권리를 찾아서 ㅡing
더 잘 돌본다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청년들의 “더 잘 돌볼 권리를 찾아서” 4회차에 걸친 포럼 동안 다양한 청년들의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노동자 청년, 장애인 청년, 성소수자 청년, 돌봄 제공자 청년 각각의 돌봄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이를 통해 청년 돌봄에 있어 더 잘 돌볼 권리란 무엇인지, 그 권리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본 글에서는 이번 기획 포럼의 발표와 토론에서 다루어졌던, 그리고 그로부터 더 확장할 수 있는 청년 돌봄에 관한 핵심적인 권리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방이 아닌 집에 살 권리
청년이 돌봄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공간/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청년들의 주거 환경은 시간/공간/자원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언젠가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돈을 모아 이사를 가거나(이미 서울에서는 불가능한), 결혼을 해서 더 넓은 거주지로 이사를 가거나(이 또한 어려운 현실) 오지 않은 특정한 미래를 상정하고 ‘방’에서 살고 있다. 청년은 어려움을 이겨낼 젊은 시기로서가 아니라 좋은 주거 환경을 동등하게 누릴 권리의 주체로서 상상되어야 한다. 신발장에 걸터서서 음식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한국의 사계절을 지낼 넉넉한 옷장을 갖고, 빨래 건조대를 펴놓아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고, 친구가 왔을 때 침대에 걸터 앉지 않아도 되고, 한낮에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햇볕이 들어오는 방이 아닌 집에 살 권리가 필요하다.
청년이 돌봄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공간/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청년들의 주거 환경은 시간/공간/자원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언젠가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돈을 모아 이사를 가거나(이미 서울에서는 불가능한), 결혼을 해서 더 넓은 거주지로 이사를 가거나(이 또한 어려운 현실) 오지 않은 특정한 미래를 상정하고 ‘방’에서 살고 있다. 청년은 어려움을 이겨낼 젊은 시기로서가 아니라 좋은 주거 환경을 동등하게 누릴 권리의 주체로서 상상되어야 한다. 신발장에 걸터서서 음식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한국의 사계절을 지낼 넉넉한 옷장을 갖고, 빨래 건조대를 펴놓아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고, 친구가 왔을 때 침대에 걸터 앉지 않아도 되고, 한낮에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햇볕이 들어오는 방이 아닌 집에 살 권리가 필요하다.
모든 공간에서 안전할 권리
돌봄을 수행하고 돌봄을 받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집, 내가 속한 공동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있는 모든 공간에서 돌봄은 필요하다. 그러므로 돌봄에 있어 전제되어야 할 것은 안전이다. ‘안전하지 못하다’는 감각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관계성을 약화시킨다. 서로의 필요를 알아차리고 내어줄 수 있는 관계, 내 필요와 욕구를 드러낼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안전하다는 감각이 중요하다. 또한 하루 일과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도 돌봄이 필요하고 가능해야 한다. 직장 내 차별적 괴롭힘, 위력에 의한 성폭력 등 나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들로부터 안전해야 한다. 이는 평등한 조직 문화 속에서 동료로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전은 외부적*물리적 위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감각 또한 포함하는 개념이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정체성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편견과 차별에서 자유로우며 타인과 관계맺기에 주저함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돌봄을 ‘선택할’ 권리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돌보는 주체이고 돌봄을 받는 대상이지만, 때로는 이 돌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돌봄이 모두의 의무일 때와 누군가에게만 의무가 될 때는 다르다. 가족구성원 내 위치, 나이, 젠더, 경제적 상황, 사회적 계급 등에 의해 내가 누군가를 돌보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다시 말해 돌보는 것밖에는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다양한 선택지들이 제시된 상황에서 돌봄을 선택하는 것과 애초에 돌봄이라는 하나의 선택지만 제시된 상황은 아주 다르다. 따라서 돌봄을 ‘선택할’ 권리는 누군가를 돌볼 것이냐 돌보지 않을 것이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그 외에도 다른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누군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들의 선택을 지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조성되는지의 문제이다.
돌봄 관계를 상상할 권리
돌봄이란 결국 관계 맺기이다. 더 잘 관계 맺는다는 건 무엇일까? 관계 맺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든, 타자이든, 세상이든, 그것들과 더 잘 관계 맺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애초에 왜 더 잘 돌보고 잘 관계 맺어야 할까? 포럼을 통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부분적인 답은 얻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빈칸으로 남은 나머지 답은 각자가 맺고 있는 관계를 돌아보고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면서 나름대로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의존과 돌봄의 관계를 다양하게 상상하고 확장하는 작업은 어떤 사소함을 포착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어쩌면 돌봄 관계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가볍고 사소하고 일상적이어서 포착하기 힘든 어떤 어려움을 인식하고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사소한 감정, 사소한 필요, 사소한 고민, 사소한 욕망 등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고 관계를 맺는 존재들이 함께 이것을 고민할 때, 공감과 이해, 타협, 친밀함, 불편함, 외로움, 긴장감과 같은 관계의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해지고, 나아가 더 잘 돌보는 관계를 향해 아주 작은 한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관계를 고민할 권리가 필요하다.
혈연 가족, 원가족에서 벗어난 돌봄 관계를 상상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돌봄은 그동안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 여성이 해야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돌봄의 영역과 관계를 공적으로 확장시킬 때, 돌봄에서의 권리와 평등을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을 받을 권리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된다. 돌봄 받는 사람의 생활을 위주로 관계가 형성되다 보면, 돌봄 제공자는 자신이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돌봄 관계가 틀어지면 돌봄 대상자의 안위가 우려되는 상황속에서 제공자는 자신의 감정과 욕구들이 이기적인 것처럼 느끼고, 불필요한 지출처럼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봄 제공자의 필요와 욕구를 제거한 체 돌봄이 작동된다면, 양질의 돌봄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돌봄은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의 관계이기에(관계를 고민할 권리의 연장선에서) 돌봄 제공자는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외부의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돌봄은 정서적 안정일 수도 있고, 금전적 지원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더 잘 돌보기 위해서는 돌봄 제공자에게 더 좋은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된다. 돌봄 받는 사람의 생활을 위주로 관계가 형성되다 보면, 돌봄 제공자는 자신이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돌봄 관계가 틀어지면 돌봄 대상자의 안위가 우려되는 상황속에서 제공자는 자신의 감정과 욕구들이 이기적인 것처럼 느끼고, 불필요한 지출처럼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봄 제공자의 필요와 욕구를 제거한 체 돌봄이 작동된다면, 양질의 돌봄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돌봄은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의 관계이기에(관계를 고민할 권리의 연장선에서) 돌봄 제공자는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외부의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돌봄은 정서적 안정일 수도 있고, 금전적 지원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더 잘 돌보기 위해서는 돌봄 제공자에게 더 좋은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도 설계의 주체가 될 권리
4회 포럼 내내 ‘청년’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나온 것은 청년이라는 세대 구분만으로는 이들의 정체성을 온전하게 규정하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회가 호명한 ‘청년’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남성으로 표상되었고, 이들은 돌봄 제공자로서도 돌봄 대상자로서도 상상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청년에 대한 납작한 이해로부터 비롯하여 설계된 돌봄 정책과 제도는 다양한 청년들의 위치와 차이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와 세대로 구분 지어지는 청년에 대한 이해를 넘어 이들의 다양성-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등의 정체성과 계급을 비롯하여-을 고려하여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 이들의 목소리를 실질적으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청년은 제도 설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기획포럼을 통해 포착한 청년 돌봄의 논의 지점들은 보편적인 시민으로서 필요한 돌봄의 논의이기도 했기에, 이들이 제도 설계의 주체가 되는 것은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나가며
"청년 돌봄, 더 잘 돌볼 권리를 찾아서"의 여정을 위와 같이 6가지의 권리로 정리해보았다.
돌봄 제공자로서도 대상자로서도 상상되지 않는 청년, 비가시화된 소수자 청년의 삶에서 더 잘 돌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짚어내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돌봄은 현재의 문제이면서 미래의 문제라는 것을 확인했다. 나 혹은 가족이나 파트너가 늙고 아플 때를 상상하는 아직 닥치지 않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누가 나를 돌보고 누구와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나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지-인 것이다.
또한 각각의 권리들은 가족 형태, 개인적·사회적 정체성, 노동 구조 등 다양한 요소들과 얽혀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우리가 어떤 계급적 위치에 놓여있거나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거나 상관없이 나로서 온전하게 존재하고 돌봄을 누릴 수 있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사회의 차별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기획포럼에서는 기존 정책의 한계를 짚고 새로운 정책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것은 누가 누구를 돌볼지 선택하고, 관계를 맺고, 자기 돌봄을 행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확인했다.
권리들의 내용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6가지의 권리는 비단 '청년'에게만 해당되는 권리가 아니다. 보편적 시민으로서, 연결되어 있는 개인과 공동체로서, 존엄한 인권을 가진 주체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권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돌봄은 기존의 가족 관련 제도나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보편적 시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하는 것으로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더 잘 돌볼 권리를 찾는' 과정은 개인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시민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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