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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25] (한겨레21)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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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세연 작성일16-05-25 12:02 조회2,8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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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여성들의 ‘#살아남았다’ 해시태그를 단 ‘생존 신고’가 계속되고 있고, 온라인을 넘어 ‘강남역 10번 출구’는 애도의 장소로 자리잡았다. 생존 신고와 애도의 물결은 대구, 부산 등 곳곳으로 퍼져가고 있다.
 
이 사회는 죽음을 언급하는 방식에서조차 계급·계층의 차이를 읽어낼 수 있다. 정치권력자는 ‘서거’하지만 평범한 누구는 ‘사망’하고 노숙인의 죽음은 그저 ‘발견’되면 그만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번 희생이 그저 ‘사건’으로 흘러가버리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추모가 널리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문화적 틀 속 ‘여성혐오’
 
여성이 피해자인 살인사건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여성 살해’에 대한 분노와 추모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아직 살아남은 여성들은 누구라도 ‘그녀’가 될 수 있음을 피부로 느끼며 공포를 절감한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성 살해, 즉 ‘페미사이드’(Femicide)라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지금 여성들이 보이는 공포와 분노에 온전히 공감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왜일까? 여성들은 지금 타인의 불행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내 몸에 들이댄 흉기의 서늘함을 체감하고 있다. ‘혹시 모를 가능성’이 아니라 지금껏 감수해왔던 각자의 체험이 끄집어내지는 것이다. ‘남 일 같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 일’이랄까. 지난 경험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참았던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여성에게 가장 빈번한 폭력은 일상 속에 존재한다.
 
사실 여성혐오(Misogyny)는 새롭지 않다. 가부장제만큼이나 역사가 길고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다. 최근 1~2년간 사회적으로 여성혐오가 논쟁되고 있지만, 요즘 들어 특별히 더 늘어난 것이라기보다 오래도록 감수해오던 여성들의 반격과 그로 인한 충돌이 적극적으로 균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란 개념은 개인의 감정과 의식, 도덕성의 차원이 아니다. 사회문화적 개념이고, 개인은 구체적 체현자이자 생산자이다. 따라서 사회구조적 젠더권력 관계와 별개로 존재하는 여성혐오란 있을 수 없다. 여성혐오가 정당화되는 사회에서 ‘여성혐오자’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공기처럼 구석구석 영향을 미친다. 결국 ‘성별이원제 젠더 질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병력을 근거로 경찰이 “정신질환에 의한 범행”이라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이번 사건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핵심은 ‘조현병’(정신분열증)과 같은 정신질환의 여부가 아니다. 오히려 가해자의 피해망상 병증이 ‘여성’을 죽여야겠다는 의식으로 이어졌다면 그거야말로 내면화된 여성혐오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범죄의 원인을 정신질환으로 지목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점은 또 다른 문제다. 실제 통계적으로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범죄율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낮다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다.
 
공감하지 못한 자의 잔혹함
 
이번 사건을 ‘여성 살해’로 규정함으로써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문제제기도 적지 않다. 불편하다고? 당연히 불편해야 하고, 그래야만 성찰이 가능하다. 내면화된 여성혐오는 지속적인 성찰을 필요로 하며,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면서 지금 이렇게 ‘여성혐오 사회’를 말하는 필자조차 예외는 아니다. 누구라도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그래도 ‘잠재적 가해자’가 ‘잠재적 피해자’인 것보다는 덜 불편하지 않겠나.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것이 불편하다’는 태도는 ‘젠더 위계’ 그리고 ‘젠더’를 삭제하고 사고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권력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문제를 지적하는 손가락이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봐야 한다. 개인 남성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 위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짜 불편하고 위험한 것은 이런 부분이 아니다. 가해자는 경찰 조사에서 “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왔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는데, 경찰과 언론이 그것을 그대로 퍼뜨렸다는 점이다.
 
모두가 기억하는 연쇄살인사건으로 1990년대 중반 ‘지존파 사건’이 있다. 당시 범인들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이유로 엽기적 살인을 벌였다고 했는데, 그 첫 범행은 20대 여성을 윤간한 뒤 살해 암매장한 것이었다. 자신들이 모의한 범행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시험 삼아 성폭행하고 살해할 수 있는 만만한 존재였다.
 
다시 10여 년 뒤 세상을 놀라게 했던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이혼과 청혼 거절에 따른 여성혐오 때문에 그랬다”며 보도방과 출장마사지 여성 11명을 살해했다. 여성들에게 “몸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는 호통까지 쳤다. 이건 마치 ‘여성혐오’가 살인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아무 이유가 없는 것보다 “여성에게 무시당해서”라고 말하는 게 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은 아닐까?
 
여성은 태어나기 전부터 성감별 ‘여아 낙태’로 죽어야 했다. “여자와 북어는 3일에 한 번씩 패야 제맛이다”라는 ‘속담’을 누구나 아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3일에 한 명꼴로 친밀한 관계인 남성의 손에 살해되는 게 우리 사회다.
 
지난 며칠간 한 여성의 애통한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작가 리베카 솔닛은 “고통에는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고통이 없다면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고,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공감은 우리가 직접 느끼지 못하는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고, 고통이 몸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함으로써 어떤 사회 구성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공감을 통한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다. 신체적 고통이 자아의 신체적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리베카 솔닛, 2016).
 
온라인 페미니즘 세대가 가져온 가능성
 
또한 죽음을 묻는 일은 생존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너의 죽음은 나에게 슬픔의 공감과, 우정의 연대를 서명하는 일만이 아니라 나의 생존, 그 익숙한 삶의 감각을 심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애도의 정치적 공간을 마련할 것인가, 혹은 애도를 통해 어떻게 정치적 삶을 다시 구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권명아, 2012).
 
성별이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권력, 상징, 가치체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야말로 민족주의만큼이나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그러므로 관습화된 젠더 질서에 대한 ‘변화’의 조짐들이 심리적 불안을 수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심리적 불안이나 불편이 다른 사람에게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로 여겨질 때, 사회적 ‘타협’은 필수적일 것이다(김현미, 2007).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애도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기억하고 성찰하는 불편함과 고통으로 말이다.
 
쉽사리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회는 달라지고 있다. 여성 억압을 설명하는 장치로서 섹스/젠더 체계는 불변하는 억압적 장치가 아니다. 아울러 전통적 기능의 상당 부분을 이미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이 없다면 그것은 저절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게일 러빈, 2015).
 
지금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애도와 분노, 그리고 용기가 어우러져 있다. 두려움을 딛고 나선 용감한 여성들이 고착된 젠더 질서에 균열을 내는 주체로 나섰다. 어쩌면 이것은 ‘온라인 페미니즘’ 세대가 가져온 새로운 가능성인지도 모르겠다. 기존 젠더 질서는 흔들리고 있지만 아직 새로운 젠더 질서는 구축되지 못한 위기의 시대,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는 아직 살아남아 있는 생존자들의 용기가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함께할 때다.
 
글 김은희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젠더정치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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