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609] (오마이뉴스) 페미니스트가 읽는 제19대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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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세연 작성일17-06-09 16:33 조회2,966회 댓글0건본문
"탁현민 책, 홍준표 자서전만큼 문제적"
(사)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gowopo)
제19대 대선이 끝난 지난 5월 28일.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이진옥 대표는 대선 과정과 대선 이후의 흐름을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평가해보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류진희(성균관대 강사/ 페미니스트 연구자), 허윤(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 권수현(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부대표)가 함께했고, 이진옥 대표가 진행 및 정리를 맡았다. 새 정부가 집권한 지 약 한달 정도가 흐른 지금,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바라본 페미니스트 의제의 위치와 영향은 어떠할까?
[하나] 페미니스트 선언, 좌절과 기대 사이
이진옥: "촛불로 이룬 탄핵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이고, 인수위 과정도 없이 새로운 정부가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면서 선거에 대해 평가할 시간이 별도로 마련되지 않아 조촐하게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나마 19대 대선을 간략하게 평가하고자 한다.
이번 대선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핵되는 사건 속에서 치러졌다는 점에서 그 어느 선거보다도 젠더 정치의 유의미한 사건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많은 대통령 후보들이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을 하신 바 있고, 어느 정도 페미니스트 의제가 선거에 깊숙이 들어온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 많은 사건들을 모두 담아 평가하기에는 지면이 제약된 관계로 주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말씀 부탁드린다."
권수현: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그 이후 과정에서 남성성을 재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선거정치 전략으로 깊숙이 들어왔지만 그 남성성은 19대 대선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각성된 20-30대 여성들이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남성성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런 여성들의 집단적인 힘과 목소리가 가시화된 것이 남성 후보들의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게 하는 동력이었다고 본다.
심상정 후보는 슈퍼맘 방지법이나 퇴행하는 동성애 인권에 대한 1분 찬스 등 다른 후보들과의 차별점을 분명하게 했는데, 이번 대선이 이념 대결이나 네거티브에서 넘어 정책 경쟁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를 했다. 더 나아가 심상정이 뛰어난 기량을 증명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를 여성의 실패가 아니라고 방증하는 방패막이 되는 효과가 적지 않았다고 본다."
허윤: "여성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번 선거는 많은 기대와 좌절을 동시에 안겼다. 분명 페미니스트 선언처럼 페미니스트라는 언어를 제도 정치에서 남성 후보자가 발언하게 하는 효과는 존재한다. 위안부 재협상이 전면적으로 제기된 것은 다행이라고 본다.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여성에게는 승리의 기억으로 각인되는 사건이었겠지만 대안적인 질서를 꿈꾸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좌절감이 상대적으로 컸던 선거였다.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후보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한다고 선거 전부터 공언을 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한 모욕이자 여성에 대한 분할 통치 전략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또 다른 한편, 정의당 내 참여계가 문재인 후보를 공개지지 선언한 것이나 녹색당에서 후보를 내지 못한 것 등 진보정당 안에서도 풀어야 숙제가 산적하다는 걸 확인했다."
[둘] 정치적 다양성 확보, '나중' 아닌 '지금'
류진희: "근현대문학 동아시아 연구자로서 생각하는 점은 최근 대만에서 세번째 정권교체를 이뤄냈던 차이잉원 여성총통은 진보적 스탠스로 당선되었던 반면, 한국의 경우에 진보는 언제나 '남성'의 얼굴로 상징되어 왔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군복을 입은 '각하' 아버지와 한복을 입은 '영부인' 어머니의 합성 사진이었다면, 새로 선출된 정부는 낡은 구두를 신고 말끔한 정장을 입은 아버지 '대통령'과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퍼스트레이디' 어머니의 조합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좋은 아버지상을 문재인에 투영하고 열광하는데, 이는 IMF 이후 '정상가족'이 붕괴되고 이후 1인 가정 및 다양한 결합이 가시화된 현실과 유리된 위화감을 더욱 조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권수현: "동의한다. 민주화 세대(386세대)의 부활과 핵가족이 이상화된 모습은 IMF 이후 기층에서 신음했던 청년층의 삶에 이질감을 더욱 불어넣을 수 있다. 사실 촛불 정국과 대선 과정에 젊은 유권자 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많이 냈지만 이들은 여전히 동원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현재 청와대에 입성하는 사람들 또는 장관 후보자들 중에서 20-30대는커녕 40대도 찾기 어렵다.(현재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만 39살이다.) 일각에서 문재인 정부 또는 더불어민주당이 최소 10년 집권플랜을 기획했다고 하는데 젊은층, 특히 페미니스트 시각을 가진 젊은 층의 여남들의 충원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앞으로의 한국사회는 현재의 헬조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윤: "박근혜 후보 당시 새누리당에는 이준석, 이자스민과 같은 청년, 이주자, 여성 등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있었는데, 민주당에서는 하다못해 그런 존재 자체가 없다. 진보가 이런 여성, 청년, 이주 등의 정치적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 그런 진보적인 의제가 꾸준히 보수에 의해 선취되어 왔다. 물론 이번에 강경화라는 인물을 외교부 장관 내정자로 선임한 것은 매우 진취적이라고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류진희: "그렇다. 피우진 보훈처장 내정도 그렇고, 그녀들의 살아온 이력과 외교, 군사, 안보 등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진일보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박근혜로 대표되는 악의 권력을 처치하기 위해 모든 진보적 의제가 정권교체를 중심으로 '나중에' 배치됐다. 문재인을 지지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긴급하다는 논리가 일부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암묵적으로 공유되고 있음이 개인적으로 가장 씁쓸했다."
[셋] '사회적 합의'를 가장한 보수화
이진옥: "지난 10년 동안 보수와 진보라는 대결구도에서 한국 사회 저변의 불평등과 차별이 기생해왔고, 그 문제를 다루지 않음으로써 사회가 더욱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왔다. 홍준표 후보가 보여줬던 여성혐오와 동성애 혐오를 정치 전략적으로 동원해 남성주의를 부활시키려는 보수의 반동을 꺾을 것인가 아니면 그 숙주를 키울 것인가는 문재인 정부에 달린 문제이다. '동성애를 반대한다,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발언 이후 당시 문재인 후보는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동성애 차별은 막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대선 기간 사법적 기본 준칙조차 지키지 않은 군형법 92조 6의 무리한 적용으로 동성애 A 대위는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이에 침묵하고 있다."
류진희: "사회적 합의를 가장한 이 보수화가 매우 우려스럽다. 앞서 말한 보수와 진보의 대결 국면으로 정치의 문제를 치환했을 때 차별금지법, 성적 자율권, 여성의 낙태권 등 다양한 기본적 인권 의제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회적 합의를 빌미로 정부가 이런 정책들의 실행을 미루는 것은 정치적 소수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군형법으로 동성애 A대위가 유죄 선고를 받은 날, 대만에서는 '헌법이 규정하는 평등원칙에 반한다'며 동성결혼을 인정하였다. 대만에서도 물론 동성결혼을 환영하지 않는 세력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들의 행복 추구에 반대하는 게 부끄럽다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사회적 합의를 기다리는 데서가 아니라 기본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만처럼 핵 발전을 멈추고, 작고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며, 민주주의와 다양성을 가치로 공유하는 사회를 한국 진보정권도 말할 수 있을지, 지금 현재로서 잘 모르겠다."
이진옥: "차별금지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는 김진표 의원을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이라는 요직에 배치한 것도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김진표는 그 자리에 들어가자마자 종교인 과세를 다시 2년 유예하겠다고 한다. 보수 기독교 세력은 동성애와 낙태죄 등에 대한 정치적 의제를 선정적으로 선점하면서 자신에 대한 개혁 압박을 회피하려 한다. 이를 지탱해줄 정치적 명분도,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이득도 없다. 보수 기독교는 종북 프레임의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것을 보고 이제 동성애 혐오 프레임을 들고 나와 자신들의 세를 유지하는 중이다."
[넷] 문재인 정부의 행보, 한국 성평등·인권의 지표가 될 것
권수현: "대선을 치르면서 여성혐오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결집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남성성의 회귀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공개적으로 여성을 비롯한 소수집단을 혐오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류진희: "한편 동의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고 바로 일베에서 자기 글들 내려달라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지만, 지금 20대는 남북관계가 대치하는 국면만 기억하고 있는, 자기 군번줄을 인증하며 강한 국방을 염원하는 신안보세대이기도 하다. 또한 지금 젊은 여성들을 향한 혐오발화가 종종 '여성부'로 대표되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에서 진행된 여성운동의 제도적 성과를 지목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한다. 향후 정책적 성 주류화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젠더 감수성을 어떻게 확대할지 전면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허윤: "문재인 정부도 여성혐오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탁현민이 행정관으로 발탁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탁현민은 5월 26일 과거 글에 대한 사과문을 올리고, 청와대 행정관이 되었다. 그 책은 사실 홍준표의 자서전만큼이나 문제적이고 여성혐오로 가득한데 '사과' 한 마디로 과거가 세탁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홍준표식 혐오 정치를 승인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탁현민을 청와대 공직에 임용해서는 안 된다."
류진희: "그 점에서 문재인 후보 캠프의 실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자기 표밭이 아닌 곳에 가서 악수를 청하고, 실제로 자기들과 함께 박근혜 정부에 대항해 싸운 쪽을 '나중에'라거나 '차별하지는 않겠다'며 외면했다. 그리고 자신을 내내 열렬하게 지지했던 이제 2030대 여성들을 단지 '촛불소녀'로만 보지 않고 실제 정책 과정에 얼마나 참여시킬지, 그들을 어떻게 대표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권수현: "그런 점에서 여성운동이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치에 참여할 여성을 키우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지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여성들만이 아닌, 이 사회에서 차별받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치·사회적으로 힘을 갖기 위해서는 정부와 의회, 정당에 더 많은 여성들이 들어가야 하고 발언권을 획득해야 한다. 앞서 페미니스트 선언과 더불어 만들어진 성과 중 하나는 남녀동수 내각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진옥: "지금 밤 11시가 넘었다. 할 얘기는 더 많지만 이만 정리를 해야 할 거 같은데 문재인 정부에 바라는 바, 문재인 시대의 페미니스트 전망에 대해 짧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권수현: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 과정에서 동수와 여성대표성 확대를 위한 강력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류진희: "분단체제 신냉전 하 한국에서 촉구되어야 할 운동 중의 운동은 국가주의와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국제연대와 평화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 한국사회를 꿰뚫는 보수 개신교의 동성애 타자화와 이성애 규범성을 목표로 하는 성 본질주의에 저항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정치의 과제라고 본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이 원안대로 포함된 온전한 차별금지법이 반드시 통과돼야한다."
허윤: "페미니스트 대통령은 탁현민, 김진표 아웃부터 바로 실천하셔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진옥: "시작에 앞서 말했듯이 문재인 정부를 향해서도 페미니스트 운동의 방향에서도 페미니스트 대선 평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를 만들었는데 그 내용을 알차게 채워주시고 좌표를 마련해주신 페미니스트 연구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강남역 사건 이후 각성된 페미니스트들이 유권자로서 목소리를 모으자, 페미니스트 의제가 대선 과정에서 '가시화'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남성 후보들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줄을 이었고, 여성의 일과 육아 병행, 남녀동수 내각, 위안부 재협상 등이 공약으로 제시되었다.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발탁된 강경화, 피우진, 조현옥 여성 인사들도 많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거 과정에서는 차별금지법 반대, 대선 후보의 여성 혹은 성소수자 대한 혐오적 발언, 문재인 후보의 '남성성'을 재생하는 선거 전략 등이 논란이 되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 성소수자가 군형법에서 유죄를 선고 받고 탁현민 행정관 발탁과 김진표 의원의 배치라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촛불의 힘으로 조기대선이라는 결과를 이루어 내었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직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있다. 앞으로의 한국 정치에서 여성주의적 목소리를 담아내는 작업의 중요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 날의 논의는 의미가 있고,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과 페미니스트들은 새 정부의 5년을 지켜볼 것이다.
▲ "5.17 강남역을 기억하는 하루 행동" 기자회견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김영순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 |
ⓒ (사)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
[하나] 페미니스트 선언, 좌절과 기대 사이
이진옥: "촛불로 이룬 탄핵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이고, 인수위 과정도 없이 새로운 정부가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면서 선거에 대해 평가할 시간이 별도로 마련되지 않아 조촐하게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나마 19대 대선을 간략하게 평가하고자 한다.
이번 대선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핵되는 사건 속에서 치러졌다는 점에서 그 어느 선거보다도 젠더 정치의 유의미한 사건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많은 대통령 후보들이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을 하신 바 있고, 어느 정도 페미니스트 의제가 선거에 깊숙이 들어온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 많은 사건들을 모두 담아 평가하기에는 지면이 제약된 관계로 주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말씀 부탁드린다."
권수현: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그 이후 과정에서 남성성을 재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선거정치 전략으로 깊숙이 들어왔지만 그 남성성은 19대 대선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각성된 20-30대 여성들이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남성성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런 여성들의 집단적인 힘과 목소리가 가시화된 것이 남성 후보들의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게 하는 동력이었다고 본다.
심상정 후보는 슈퍼맘 방지법이나 퇴행하는 동성애 인권에 대한 1분 찬스 등 다른 후보들과의 차별점을 분명하게 했는데, 이번 대선이 이념 대결이나 네거티브에서 넘어 정책 경쟁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를 했다. 더 나아가 심상정이 뛰어난 기량을 증명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를 여성의 실패가 아니라고 방증하는 방패막이 되는 효과가 적지 않았다고 본다."
허윤: "여성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번 선거는 많은 기대와 좌절을 동시에 안겼다. 분명 페미니스트 선언처럼 페미니스트라는 언어를 제도 정치에서 남성 후보자가 발언하게 하는 효과는 존재한다. 위안부 재협상이 전면적으로 제기된 것은 다행이라고 본다.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여성에게는 승리의 기억으로 각인되는 사건이었겠지만 대안적인 질서를 꿈꾸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좌절감이 상대적으로 컸던 선거였다.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후보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한다고 선거 전부터 공언을 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한 모욕이자 여성에 대한 분할 통치 전략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또 다른 한편, 정의당 내 참여계가 문재인 후보를 공개지지 선언한 것이나 녹색당에서 후보를 내지 못한 것 등 진보정당 안에서도 풀어야 숙제가 산적하다는 걸 확인했다."
[둘] 정치적 다양성 확보, '나중' 아닌 '지금'
류진희: "근현대문학 동아시아 연구자로서 생각하는 점은 최근 대만에서 세번째 정권교체를 이뤄냈던 차이잉원 여성총통은 진보적 스탠스로 당선되었던 반면, 한국의 경우에 진보는 언제나 '남성'의 얼굴로 상징되어 왔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군복을 입은 '각하' 아버지와 한복을 입은 '영부인' 어머니의 합성 사진이었다면, 새로 선출된 정부는 낡은 구두를 신고 말끔한 정장을 입은 아버지 '대통령'과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퍼스트레이디' 어머니의 조합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좋은 아버지상을 문재인에 투영하고 열광하는데, 이는 IMF 이후 '정상가족'이 붕괴되고 이후 1인 가정 및 다양한 결합이 가시화된 현실과 유리된 위화감을 더욱 조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권수현: "동의한다. 민주화 세대(386세대)의 부활과 핵가족이 이상화된 모습은 IMF 이후 기층에서 신음했던 청년층의 삶에 이질감을 더욱 불어넣을 수 있다. 사실 촛불 정국과 대선 과정에 젊은 유권자 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많이 냈지만 이들은 여전히 동원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현재 청와대에 입성하는 사람들 또는 장관 후보자들 중에서 20-30대는커녕 40대도 찾기 어렵다.(현재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만 39살이다.) 일각에서 문재인 정부 또는 더불어민주당이 최소 10년 집권플랜을 기획했다고 하는데 젊은층, 특히 페미니스트 시각을 가진 젊은 층의 여남들의 충원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앞으로의 한국사회는 현재의 헬조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윤: "박근혜 후보 당시 새누리당에는 이준석, 이자스민과 같은 청년, 이주자, 여성 등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있었는데, 민주당에서는 하다못해 그런 존재 자체가 없다. 진보가 이런 여성, 청년, 이주 등의 정치적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 그런 진보적인 의제가 꾸준히 보수에 의해 선취되어 왔다. 물론 이번에 강경화라는 인물을 외교부 장관 내정자로 선임한 것은 매우 진취적이라고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류진희: "그렇다. 피우진 보훈처장 내정도 그렇고, 그녀들의 살아온 이력과 외교, 군사, 안보 등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진일보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박근혜로 대표되는 악의 권력을 처치하기 위해 모든 진보적 의제가 정권교체를 중심으로 '나중에' 배치됐다. 문재인을 지지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긴급하다는 논리가 일부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암묵적으로 공유되고 있음이 개인적으로 가장 씁쓸했다."
[셋] '사회적 합의'를 가장한 보수화
이진옥: "지난 10년 동안 보수와 진보라는 대결구도에서 한국 사회 저변의 불평등과 차별이 기생해왔고, 그 문제를 다루지 않음으로써 사회가 더욱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왔다. 홍준표 후보가 보여줬던 여성혐오와 동성애 혐오를 정치 전략적으로 동원해 남성주의를 부활시키려는 보수의 반동을 꺾을 것인가 아니면 그 숙주를 키울 것인가는 문재인 정부에 달린 문제이다. '동성애를 반대한다,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발언 이후 당시 문재인 후보는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동성애 차별은 막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대선 기간 사법적 기본 준칙조차 지키지 않은 군형법 92조 6의 무리한 적용으로 동성애 A 대위는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이에 침묵하고 있다."
류진희: "사회적 합의를 가장한 이 보수화가 매우 우려스럽다. 앞서 말한 보수와 진보의 대결 국면으로 정치의 문제를 치환했을 때 차별금지법, 성적 자율권, 여성의 낙태권 등 다양한 기본적 인권 의제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회적 합의를 빌미로 정부가 이런 정책들의 실행을 미루는 것은 정치적 소수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군형법으로 동성애 A대위가 유죄 선고를 받은 날, 대만에서는 '헌법이 규정하는 평등원칙에 반한다'며 동성결혼을 인정하였다. 대만에서도 물론 동성결혼을 환영하지 않는 세력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들의 행복 추구에 반대하는 게 부끄럽다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사회적 합의를 기다리는 데서가 아니라 기본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만처럼 핵 발전을 멈추고, 작고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며, 민주주의와 다양성을 가치로 공유하는 사회를 한국 진보정권도 말할 수 있을지, 지금 현재로서 잘 모르겠다."
이진옥: "차별금지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는 김진표 의원을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이라는 요직에 배치한 것도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김진표는 그 자리에 들어가자마자 종교인 과세를 다시 2년 유예하겠다고 한다. 보수 기독교 세력은 동성애와 낙태죄 등에 대한 정치적 의제를 선정적으로 선점하면서 자신에 대한 개혁 압박을 회피하려 한다. 이를 지탱해줄 정치적 명분도,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이득도 없다. 보수 기독교는 종북 프레임의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것을 보고 이제 동성애 혐오 프레임을 들고 나와 자신들의 세를 유지하는 중이다."
[넷] 문재인 정부의 행보, 한국 성평등·인권의 지표가 될 것
권수현: "대선을 치르면서 여성혐오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결집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남성성의 회귀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공개적으로 여성을 비롯한 소수집단을 혐오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류진희: "한편 동의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고 바로 일베에서 자기 글들 내려달라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지만, 지금 20대는 남북관계가 대치하는 국면만 기억하고 있는, 자기 군번줄을 인증하며 강한 국방을 염원하는 신안보세대이기도 하다. 또한 지금 젊은 여성들을 향한 혐오발화가 종종 '여성부'로 대표되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에서 진행된 여성운동의 제도적 성과를 지목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한다. 향후 정책적 성 주류화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젠더 감수성을 어떻게 확대할지 전면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허윤: "문재인 정부도 여성혐오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탁현민이 행정관으로 발탁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탁현민은 5월 26일 과거 글에 대한 사과문을 올리고, 청와대 행정관이 되었다. 그 책은 사실 홍준표의 자서전만큼이나 문제적이고 여성혐오로 가득한데 '사과' 한 마디로 과거가 세탁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홍준표식 혐오 정치를 승인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탁현민을 청와대 공직에 임용해서는 안 된다."
류진희: "그 점에서 문재인 후보 캠프의 실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자기 표밭이 아닌 곳에 가서 악수를 청하고, 실제로 자기들과 함께 박근혜 정부에 대항해 싸운 쪽을 '나중에'라거나 '차별하지는 않겠다'며 외면했다. 그리고 자신을 내내 열렬하게 지지했던 이제 2030대 여성들을 단지 '촛불소녀'로만 보지 않고 실제 정책 과정에 얼마나 참여시킬지, 그들을 어떻게 대표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권수현: "그런 점에서 여성운동이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치에 참여할 여성을 키우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지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여성들만이 아닌, 이 사회에서 차별받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치·사회적으로 힘을 갖기 위해서는 정부와 의회, 정당에 더 많은 여성들이 들어가야 하고 발언권을 획득해야 한다. 앞서 페미니스트 선언과 더불어 만들어진 성과 중 하나는 남녀동수 내각에 대한 약속이었다."
▲ 5월 28일 저녁,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제19대 대선과 그 이후의 페미니스트 의제의 위치와 영향에 대해서 평가하고 있다. | |
ⓒ (사)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
이진옥: "지금 밤 11시가 넘었다. 할 얘기는 더 많지만 이만 정리를 해야 할 거 같은데 문재인 정부에 바라는 바, 문재인 시대의 페미니스트 전망에 대해 짧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권수현: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 과정에서 동수와 여성대표성 확대를 위한 강력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류진희: "분단체제 신냉전 하 한국에서 촉구되어야 할 운동 중의 운동은 국가주의와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국제연대와 평화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 한국사회를 꿰뚫는 보수 개신교의 동성애 타자화와 이성애 규범성을 목표로 하는 성 본질주의에 저항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정치의 과제라고 본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이 원안대로 포함된 온전한 차별금지법이 반드시 통과돼야한다."
허윤: "페미니스트 대통령은 탁현민, 김진표 아웃부터 바로 실천하셔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진옥: "시작에 앞서 말했듯이 문재인 정부를 향해서도 페미니스트 운동의 방향에서도 페미니스트 대선 평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를 만들었는데 그 내용을 알차게 채워주시고 좌표를 마련해주신 페미니스트 연구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강남역 사건 이후 각성된 페미니스트들이 유권자로서 목소리를 모으자, 페미니스트 의제가 대선 과정에서 '가시화'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남성 후보들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줄을 이었고, 여성의 일과 육아 병행, 남녀동수 내각, 위안부 재협상 등이 공약으로 제시되었다.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발탁된 강경화, 피우진, 조현옥 여성 인사들도 많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거 과정에서는 차별금지법 반대, 대선 후보의 여성 혹은 성소수자 대한 혐오적 발언, 문재인 후보의 '남성성'을 재생하는 선거 전략 등이 논란이 되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 성소수자가 군형법에서 유죄를 선고 받고 탁현민 행정관 발탁과 김진표 의원의 배치라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촛불의 힘으로 조기대선이라는 결과를 이루어 내었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직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있다. 앞으로의 한국 정치에서 여성주의적 목소리를 담아내는 작업의 중요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 날의 논의는 의미가 있고,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과 페미니스트들은 새 정부의 5년을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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