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08] (여성신문) ‘탁현민 사건’ 이후 그 ‘정치’가 놓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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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세연 작성일17-11-13 13:36 조회2,971회 댓글0건본문
‘탁현민 사건에 대한 여성운동 집담회’
탁 행정관의 발화는 ‘쿨걸 판타지’
내세워 여성 소비하는 낡은 방식
왜 이 발언이 도태되지 않나?
수많은 여성혐오 발화가
사회에 미친 손해 계산해봐야
“‘사람이 먼저인 세상’은 바로 성평등한 세상”이라던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성평등 공약을 얼마나 지켰을까? 초기 인선에서부터 새 정부는 낙제를 면치 못했다. 상식 이하의 젠더 의식을 드러내 해임 요구를 받은 탁현민 청와대 선임행정관은 여전히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최근 그는 자신의 발언에 분노한 한 여성이 여성신문을 통해 발표한 기고에 대해 ‘허위사실로 명예를 훼손했다’며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출범 6개월을 맞은 새 정부의 성평등 원칙과 방향을 가늠하는 토론회가 6일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렸다.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과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이번 토론회의 주제는 ‘탁현민 사건의 현재진행형에 대한 여성운동 집담회, 그 ‘정치’가 놓친 것들: We Can Speak’. 페미니스트를 자임한 문재인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의 젠더 정치와 이른바 ‘탁현민 사건’이 여성운동계에서 갖는 의미와 대응 방안에 대해 짚어보는 자리였다.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 김혜정 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발제를 했다. 이어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김태희 한국여성정치연맹 이사,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전홍기혜 프레시안 기자가 토론을 벌였다.
50대 엘리트 남성은 ‘주류’로
여성은 다시 정치 ‘주변’으로
문재인 정부의 출범 초기 여성 인선은 파격적이었다. 조현옥 청와대 인사수석, 피우진 보훈처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 등 주요 보직을 여성이 차지했다. 공약대로 ‘여성 내각 30%’도 달성했다.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여성운동이 주장해온 여성대표성 강화 요구에 대한 반응, 최근 성장하는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한 응답”이자 “젠더 정치 변화의 중요한 발판”이라고 평가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50대 서울대 출신 엘리트 남성들이 문재인 정부의 ‘주류’를 이루고, 이들이 수구 권력의 적폐에 맞서는 ‘투사’로 떠오르면서, 여성은 다시 정치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 내정 등 차별적이고 비상식적인 여성관을 가진 인물을 반복적으로 등용한 점도 비난을 샀다. 이 대표는 “여성은 각 남성 집단의 대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기능하는 데에 그치고, 여성 내각 30%의 상징성은 소멸할” 우려가 높아졌다고 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탁현민 사건’이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탁 행정관은 성차별적인 생각을 넘어 성차별을 선동하는 말과 글을 출판했다”고 일갈했다. 탁 행정관이 2007년 펴낸 『남자 마음 설명서』엔 “등과 가슴의 차이가 없는 여자가 탱크톱을 입는 건 테러를 당한 기분”, “이왕 입은 짧은 옷 안에 뭔가 받쳐 입지 마라”, “여자는 예쁘면 어느 정도 선까지는 다 용서가 된다. 그렇다고 예쁘기만 해선 안 된다. 가슴에 볼륨도 있어야 하고, 가슴골을 적당히 과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등 여성을 철저히 남성의 관점에서 도구화·대상화하는 표현이 가득하다. 이는 “성적 엄숙주의에 맞서는 솔직한 코칭도, 본인의 소소한 경험을 말한 것도 아니라, 여성이 남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따라야 할 기준을 제시하고, 평가하고, 모든 남자가 그러하다고 단언한 것”에 불과했다.
여성계를 중심으로 탁 행정관 해임 요구가 빗발친 이유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도 나서서 해임을 건의했다. 한 공직자의 도덕성 문제를 넘어 새 정부의 성평등 철학과 원칙을 가늠할 수 있는 인선이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정 장관의 해임 건의 발언와 관련해 “대통령 인사권은 존중돼야 한다”고만 밝혔다. 탁현민 행정관 임용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진영의 문제’ 취급당했다. 문 정부 지지자들은 ‘이제 막 출범한 정부를 흔들지 말라’며 페미니스트의 입을 막으려 한다. 보수 진영은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이용해 정부를 압박하려 한다.
파문이 커지자 탁 행정관은 언론을 통해 “내 말이 많은 부분 왜곡됐지만 반성한다”고 밝혔다. 친구들과 ‘공유’한 ‘쿨한’ 여중생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며 자신이 ‘대놓고나쁜남자’ 캐릭터를 연기한 결과라고 변명했다. “침통한 심정으로 사과하겠다”던 그는 오히려 여성신문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여성신문에 실린 한 여성의 기고가 “허위 사실을 적시해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권을 침해했다”는 게 이유였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 소식에 “분노와 황당함”을 표했다. 김 부소장은 탁 행정관이 입은 ‘손해’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그의 수많은 혐오 발화가 “성폭력이 아니고 법적으로도 문제 되지 않는 일로 여겨지게” 됐다는 점이 중요한 문제라고 봤다.
탁현민 행정관의 임용 비판은
보수 진보에 ‘진영 문제’ 취급
여성에 대한 폭력은 사소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적 범죄로 규정돼야 한다고 반성폭력 운동단체와 성폭력 피해자들은 강조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오래된 구호처럼, 일상에 만연한 ‘강간문화’를 성찰하고 바꾸려 노력해야 성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뜻이다. “탁 행정관의 여성신문 고소는 이러한 여성운동의 요구에 대한 명백한 반격(backlash)”이라고 김 부소장은 말했다.
탁 행정관의 혐오발화가 일으킨 사회적 파문도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여성학자인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탁 행정관의 발화는 남성의 성적 요구에 쉽게 응하면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판타지, 즉 ‘쿨걸 판타지’를 내세워 여성을 소비하는 낡은 방식이다. 왜 아직도 이런 발언이 도태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고도 청와대에서 일할 수 있다니,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성적 존재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묻게 된다”고 말했다. 김 부소장은 “이렇게 명백한 여성혐오 발화가 사회에 미친 손해는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크다. 청와대는 탁 행정관 해임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그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여 “혐오발화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 김 부소장에 따르면 “탁현민 행정관의 성차별·여성혐오 문화와, 허구와, 출판과, 손해배상 청구는 책임질 일 아니라는 선례” 앞에서 문재인 정부의 ‘젠더폭력 근절’ 대책은 공허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 대표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고, 여성 대표성 강화를 공약하면서도 낙태죄 폐지와 차별금지법 제정은 유보하고, 동성애 이슈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를 논하는 문재인 정부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했다. 이러한 “문재인 정부의 여성운동 분할 통치 전략”은 곧 “민주주의의 복원을 외치면서도 민주주의의 기본을 잠식하는 역설”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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